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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먼지 쌓인 유리창

개발자 치즈 2024. 10. 20. 18:00

 

 

화양연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의 그리움은 고장난 비디오 테이프처럼 재생을 위해 얼기설기 붙여진다. 따라서 한 편의 멀티버스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사건들은 때로 같은 대사와 몸짓에서 시작하다가 약간의 변주를 통해 서로 다른 결과를 보여주기도 하고, 숨막히게 아름다웠던 지난 순간을 슬로우 모션으로 늘이기도 하며, 거울의 반사를 통해 동일 인물이 다공간 속에 놓여지도록 만들기도 한다. 사랑의 배신을 당한 남녀는 ‘자신이 서로의 배우자라면’, 또는 ‘서로가 사랑하는 연인이라면’이라는 가정을 놓고 그것을 반복 재생하며 서로 다른 우주의 주모운(양조위)와 소려진(장만옥)을 생산해낸다. 한 우주에서 두 남녀는 사랑에 빠지고, 다른 우주에서 두 남녀는 헤어져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미장센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영화의 분위기는 피어오르는 연기와도 같다. 가장 마지막 장면에서 언급된 “볼 수는 있지만 만질 수는 없는 먼지 쌓인 유리창"과 동일한 맥락이다. 주모운이 연신 피우는 연초로부터 뿜어지는 연기는 정지된 시공간-캔버스 내에서 물감처럼 움직인다. 따라서 회화적인 느낌이 강하다. 주모운과 소려진의 은밀한 밀회를 보여줄 때 커튼, 옷, 벽 등으로 화면을 가려 관객들이 마치 관음하는 느낌을 준다. 둘 만의 비밀을 들여다봐야하는 이야기이기에 더욱 그들을 바라보는 틈을 좁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주 허름하고 비좁은 방들이 아름다운 두 배우의 몸과 얼굴, 그들의 정갈한 머리, 갖춰 입은 옷들로 꽤나 근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공간들로 변모한다. 그들이 간직하는 추억은 아름다워야만 하기에, 왕가위 감독은 푸른 조명과 붉은 코트, 날마다 바뀌는 치파오 의상, 기하학적인 무늬를 띤 벽지 등으로 무채색의 기억을 선명하게 덧칠하려고 한다. 우아하게 흐르는 바이올린의 선율(곡: Yumeji's theme)과 냇 킹 콜의 곡들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아름다운 음악과 그에 어울리는 장면이 몇 초간 지속되면서 그 장면에 흠뻑 몰입할 때 즈음, 감독은 사운드를 날카롭게 끊어냄으로써 관객과 등장인물 사이의 거리를 넓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