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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을 깨우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잔상들

개발자 치즈 2024. 11. 9. 16:38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드라이브 마이 카>를 중심으로

 

1. 두 영화의 틈을 메우는 감각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왼쪽)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오른쪽)

 

  <드라이브 마이 카> 후반부에서 가후쿠와 미사키가 찾아간 고향을 보면, 아마도 이 영화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적막한 겨울 숲에서 무미건조한 부녀가 입은 푸른색 옷과 자연 속에 파묻힌 죽음-사치 혹은 사슴-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장면들이 서로 겹쳐 보이는 것은 그저 단순한 우연이었을까. 이후 팬데믹이 한창인 부산에선 마스크를 낀 채 여행을 떠나는 미사키가 있고, 도쿄에는 코로나 보조금을 받기 위해 글램핑장 착공을 서두르려는 플레이모드 직원들이 있다. 그들은 모두 고단한 각자의 생계와 한 생명의 죽음 앞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사슴은 죽어 뼈를 남기고, 새는 죽어 깃털을 남기는데, 이 페르소나들의 죽음 끝에 남은 것은 살아남은 자들의 길고 긴 낮과 밤이다. 그러한 점에서 두 영화는 한결같이 닮아있다. 

드.마.카의 마지막 <바냐아저씨> 연극 장면의 일부분

 

  이에 감독은 <바냐 아저씨>의 소냐처럼 하늘 위에서 자신들의 삶이 고통스러웠더라고 푸념하는 영혼들 대신, 하늘 아래서 바지런히 살아가는 관객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통각을 되짚어준다. 당신들이 숨 차게 살아가는 이곳은 어떠한 선도 악도 구분하기 어려워 스스로의 가슴에 선(線)을 그어야 하기에 외로운 곳이라고. 하마구치 감독이 바라보는 이 애매모호한 세계가 때로는 조용한 롱테이크 씬들로, 때로는 쉼없이 이어지는 대사들로 가득 차 있어서 관객의 눈과 귀를 지루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이 오히려 농밀한 화면들 사이로 관객의 감각이 틈입할 수 있는 낯선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예컨대 두 영화의 결말은 모두 이전까지 부드럽게 이어져오던 서사를 단절시키고, 그럼으로써 관객에게 그 상실된 서사의 틈을 메우도록 종용한다.

 

  <드.마.카>의 연극이 막을 내리고 무대가 어두워진 뒤에 뜬금없이 미사키가 부산의 마트에서 혼자 장을 보는 장면을 떠올려보자. 무슨 까닭인지 그녀의 빰에 나있던 상처는 말끔히 사라진 상태고, 빌렸는지 소유하게 되었는지 모를 가후쿠의 붉은색 사브 900과 유나의 안내견을 데리고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영화가 끝이 난다. 그러면 관객은 객석에서 연극을 바라보던 미사키와 홀로 여정을 떠나는 미사키 사이의 간극을 채워야만 한다. 한편, <악.존.않>에서는 목이 졸려 기절한 타카하시를 뒤로한 채 타쿠미가 자신의 딸을 안고 안개가 가득한 숲 한 가운데로 들어간다. 그 다음 이어지는 장면은 영화의 오프닝 숏과 수미상관을 이루듯 어느새 어두워진 숲의 직앙각 숏과 함께 누군지 알 수 없는 숨소리(FILO 인터뷰에 따르면 타쿠미 역의 오미카 씨의 음성)로 끝난다. 결국엔 모두 관객으로 하여금 그들 상상력으로 비워진 서사를 채우게끔 한다는 것이다. 류스케는 섣불리 해답을 내어주지 않으며 그렇기에 관객은 저마다 다른 감정과 경험들로 그가 배치한 틈새들을 단단히 메꾸는 영화의 이음새 역할을 자초한다. 

  두 영화의 음악을 맡은 이시바시 에이코에 의해 신비로운 분위기가 한층 더 두터워졌는데, 이는 하마구치의 주도면밀한 숏들 사이로 무언의 공백이 발생할 때, 이시바시의 음악이 틈입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드.마.카>의 미사키가 엄마에게 학대를 당하며 운전을 배운 이야기, 가후쿠와 오토가 섹스를 통해 기발한 글상들을 출산했던 이야기, (다카츠키가 아마도 오토와 섹스를 하며 들었을) 성도착증을 보이는 여고생의 뒷이야기, 타인들로서는 꽤 자극적으로 들리는 여러 고백들을 긴 호흡으로 들려준 후에 마땅한 응답을 찾지 못한 인물들 사이로 적막을 깨주는 사운드를 조심스럽게 집어넣는다. 차 안에서 벌어지는 이 의미심장하고도 긴박한 대화 끝에, 서늘해진 공기 속으로 스며드는 잔잔한 선율이 마침내 관객의 이야기가 들릴만한 틈을 내어준다. 그러면 저마다 신기하고 묘한 순간들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악.존.않>에서는 느슨하게 이어지는 자연 풍경들 사이에 웅장한 사운드가 부딪히면서 마치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관객의 감각을 일깨운다. 오프닝 씬의 하늘 트래킹에서 차분한 음악으로 관객의 긴장을 풀어주다가, 갑자기 90도로 덜컥 내려앉는 숏과 함께 고요를 찢는 전기톱 소리를 들려주는 식이다. 그 다음부터 단조로운 화면들이 만들어내는 타성의 틈에 관객의 새로운 의문 부호가 자리를 잡게 되며, 에이코의 음악과 류스케의 화면이 서로 충돌하며 꿈틀대는 사이, 이에 감응한 관객은 감독조차 형언할 수 없었던 질문에 조용히 응답하게 된다. 우리들이 숨 차게 살아가는 이곳은 영화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워 끊임없이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곳이라고. 그러므로 에이가닷컴의 인터뷰에서 류스케가 말한 것처럼, ‘에이코가 건넨 두 영화의 음악은 이미지적으로 다르지 않다’. 

 

2. 하마구치 류스케의 ‘다루마상가 고론다' 

  우리나라에서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통용되는 놀이가 <악.존.않>의 한 장면으로 등장했을 때, 놀이에서 작용하는 일련의 규칙들이 마치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속 사운드 및 카메라의 움직임들과 닮아있다고 느꼈다. 먼저 술래가 멀찍이 서서 눈을 가리고 ‘다루마상가 고론~다'를 연달아 외친다. 구호가 끝남과 동시에 뒤를 재빠르게 돌아보면, 일제히 정지하는 아이들. 모두가 숨죽이는 적막 속에서 술래는 조금이라도 미동이 있는 아이를 잡아내기 위해 긴 호흡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멈춤을 참지 못한 아이가 다음 술래가 된다. 영화에서는 하마구치가 술래이고,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움직이는 등장 인물들은 아이들이 되어 놀이를 시작한다. 

  여기서 술래에 의해 반복되는 일정한 구호는 <드.마.카>에서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것이기도 한, 서로 다른 언어로 번역되기 위해 되풀이되는 희곡의 대사들을 연상케 한다. 일어, 한국어, 중국어, 베트남어, 수어까지 최소 다섯 가지의 언어가 섞인 똑같은 대사를 여러 번 반복시키는 이유에 대해 하마구치의 답변 대신, 감정 없이 대본을 읽게 하는 가후쿠의 지시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언어로 된 상대역 대사의 뜻을 알 수 없어 연기를 하기 어렵다는 재니스를 향해 가후쿠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며 다시 대본 읽기를 시킨다. 이후 야외 공원에서 재도전하는 재니스는 연습 끝에 ‘대사'라는 장벽을 뛰어넘고, 그 속에서 피어나는 ‘무언의 감정’을 통해 비로소 수어로 연기하는 유나와 교감하게 된다. 그 반짝이는 순간에 대하여 가후쿠가 ‘좋아. 지금 뭔가 일어났어.’라고 말한다. 하마구치 감독 또한 같은 희곡의 구절을 관객으로 하여금 여러 번 곱씹게 만들며, 그로부터 관객에게 어떠한 감정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는 교감이라는 것이 꼭 명확한 언어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고 감정 혹은, ‘영화의 언어’를 통해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하마구치가 구호를 외쳤으니, 이제는 그가 뒤를 돌아볼 때다. <드.마.카>의 가후쿠와 미사키가 홋카이도에 도달하는 여정 중, 카메라는 목적지의 반대 방향을 화면에 담기 시작한다. 낮과 밤의 터널을 지날 때 자동차의 후미 시점으로 한 번씩, 그리고 물살을 가르는 페리의 후미를 통해 또 한 번 뒷편을 비춘다. <악.존.않>에서도 자동차의 뒷통수 시점이 일관적으로 삽입되며 관객으로 하여금 비일상적인 감각을 깨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서사의 흐름을 따라 앞을 보고 이동하는데, 하마구치는 관객에게 그들이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라고 선언하는 듯하다. 그러면 관객이 스크린에서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움직이지 않는 주변 가운데 미약하게나마 움직이는 무엇이 될 것이다. 그것은 객석에 가만히 앉아서 무대를 감상하는 극중극의 관객이 될 수도, 가볍게 귀를 털며 정면을 응시하는 사슴이 될 수도 있다. 감독은 이렇듯 뒤를 바라보는 화면 안에서 약동하는 무언가를 주시하도록 만들고, 그 가운데서 발생하는 낯선 감각들에 귀를 기울이도록 한다.